2011년 8월 2일 화요일

바보들의 언덕, 그들이 굴린 바위에 깔려 죽어야 한다.

바보들의 언덕, 그들이 굴린 바위에 깔려 죽어야 한다.


나 홀로 협곡을 지난다. 그 곳은 회색 암벽이 지나치게 길게 펼쳐져 있다. 겨우 사람 한둘이 지날 수 있는 그 협곡의 꼭대기에는 바보들이 옹기종기 모여 독수리의 눈을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협곡에 메아리쳐 공포스럽고 소름 끼치는 소리로 들린다. 매서운 눈을 한 그는 바보들이 굴린 바위에 깔려 죽었다. 그렇게 죽은 시체들이 온통 널부러져 있고 나는 그 시체들의 손을 붙잡고 독수리 눈을 한 그의 초점 잃은 눈동자를 바라본다.

나도 저 바위에 깔려 죽으리라,, 그리고 다시 일어나서 가벼운 만신창이 몸을 이끌고 저 협곡을 통과해야지.

2011년 3월 13일 일요일

완벽의 추구 - 탈-벤 샤하르

완벽의 추구

완벽주의 VS 최적주의

완벽주의에 대한 이중적 인식이 있다. 무엇이든 꼼꼼하고 세심하면서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는 능력에 대한 인식과 지나치게 완벽을 추구해 결벽증을 가진 사람과 같은 인식이 그것이다.

완벽주의자는 끝없는 탐욕과 현실을 인식하지 않으려는 욕망에 기인한다. 어떤것을 이루어 내도 성취감을 갖지 못하고, 감정의 파도를 피한다. 표정에는 눈물도 없고 기쁨도 없다. 약해보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또한 거부한다. 사람이 기계와 다른 점을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을 기계처럼 취급한 나머지 시간이 지날수록 피폐하고 거북한 삶을 살아간다.
그에 반해, 최적주의자는 탐욕과 욕심이 있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자신의 기초를 쌓는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감정의 폭포수를 온 몸으로 맞으며, 눈물이 흐르면 그것을 고이고 흐르게 둔다. 기쁘면 세상을 가진 사람처럼 펄쩍펄쩍 뛰며 기쁨을 맛보며, 설사 그것을 내색하지 않으려 하더라도 스스로의 시간에 고이 묻어두었던 눈물과 웃음을 조심스레 꺼내 맛을 본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고 안정된 상태는 없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타인의 단점을 받아들이고 그가 내게 완벽한 사람이 아님을 강하게 인지해야 한다. 영화나 잡지에서 보는 완벽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그 것을 연기하는 사람들 마저 완벽하지 못함에 대해 몸서리치도록 고통스러워하고 있을지 그 누가 아는가?
현대 사회를 살면서 슬픈 감정을 숨기고 눈물을 삼켜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눈치채지 못하게 배우고 있다. 항상 기쁘고 행복하고 단 1초라도 슬픈 감정이 든다면 마치 우리의 인생이 실패하고 나약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드는 현실에 살고 있다.

똑같은 사건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누구나 다르다. 그렇기에 우리 역시 질병에 대한 면역체를 갖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훈련시킬 필요가 있다. 그 훈련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보이지 않는 중력이 우리는 끌어당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처럼 우리의 감정 역시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느끼지 않은 것처럼 혹은 있지도 않은 일처럼 여긴다면 술로 힘든 상황을 지워버리는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또 다시 그 일이 일어났을때는 아무런 면역체계를 갖지 못하고 그 더러운 감정을 다시 느껴야 한다.
중력을 인정하는 것처럼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안으로 흘려들여 보낸다. 기다리거나 기대했던 일들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우선 실망감, 좌절감을 있는 그대로 느낀다. 그 감정을 피하거나 자신을 자책하거나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있는 그대로 자기 안으로 흘려 보낸다.
그 다음 상황을 이성적으로 재구성해본다. 실패를 했다면 그 상황에서 배울 점은 무엇이고 얻을 교훈은 무엇이며 앞으로 나의 성장에 얼만큼의 자양분이 될 것인지를 생각해본다. 관계에서 실망을 했다면 자신이 그 관계를 삶 속에서 너무나 크게 비중을 잡고 있는건 아닌지 자신을 덜 사랑해서 그런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재구성한 그 상황을 배우고 다음번에는 실패하지 않거나 관계를 재정리하는 시간을 가진다.

이러한 훈련은 감정에 대한 면역체계를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극단적 예를 들자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교훈을 얻을 수 있고, 어떤 관계에서도 자신을 더 사랑하는 길을 찾을 수 있다. 실패에 대해 더 대담해지고 안정된 길을 추구하는 길을 벗어버리고, 보다 많은 시도를 할 수 있고 용감하게 쟁취할 수 있다. 평소에는 실패를 두려워한 나머지 시도하지도 못할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시험을 모험으로 생각하는 면역체계를 가진다면 긴장되고 떨더라도 부딪힐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뇌는 더 말랑말랑해졌다. 보다 많은 성취감을 맛보고 큰 그리움을 느끼며 슬픈만큼 기쁘다. 책을 추천해준 순희에게 참 감사하다. 그 계기로 인해 나는 또 강해졌고 지혜로워졌다.

2010년 3월 17일 수요일

내가 흔들리면

내가 흔들리면
내 주변은 요동친다.

내가 확고하면
내 주변은 흔들린다.

내가 독보적이면
내 주변은 확고해진다.

2010년 3월 12일 금요일

소유에 대한 열망은 나를 나약하게 만들고 비굴하게 만든다

  생존의 문제에서 벗어나는 순간부터는 돈은 대게 소유에 대한 갈증을 유발한다. 이때부터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야하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고 현실과 현 시대와 타협한다. 환경과 주변 사람들, 가족과 미래의 소비. 그래서 이도저도 아닌 위치에 서게 되고 공허함만이 주변을 맴돈다.


    소유에 대한 열망은 나를 나약하게 만들고 비굴하게 만든다.

진실로 내가 가진 단 하나의 것은 이 몸과 정신이다.

  방석을 3개나 깔고 그 아래 신문 더미를 쌓아놓고 앉아있는 그 노숙자는 지하철 역의 수 많은 사람들의 깊이보다 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의 무게는 쳇바퀴 도는 우리들보다 심오하겠지. 늘어져 있는 쭉편 다리와 벽에 기대 눈을 감고 있는 그는 편안하면서도 정자세를 유지하며 어떤 것에 몰입해 있겠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수행하는 이의 그림자를 나는 보았다.
  어두운 방안에서 편안한 자세, 잠든 것이 아닌 상태로 어떤 생각에 잠겨 있을 때면 스치우는 생각들에 기진맥진 해지기도 한다. 스스로의 생각이 나를 움켜쥐고 던지기도 하며 물 위에 놓아버리기도 한다. 사색의 시간이 없다면 너무도 익숙해져 버린 삶의 무게에 짓눌려버릴 것이 뻔하다. 감동과 삶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일상에서 망각되듯이, 그리고 한 편의 시가 찬물이 되어 나를 일깨우듯이 개인의 사색의 시간은 단조롭고 멍청해지기 쉽상인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넥타이와 흰색 셔츠의 깨끗함과 정적인 목졸림이 도리어 편해져 내가 다람쥐인지 사람인지조차 헷깔리는 지하철 역의 수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살고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할 여력이 없다. 목을 조르는 넥타이의 익숙함만큼 삶 역시 옥죄여져 있다. 물이 끓는지 모르고 죽어가는 개구리인 지하철역 사람들은 한낫 노숙자만 못하다. 그들에게는 빼앗기면 안되는 것들, 지켜야 할 것들, 갖고 싶은 것들, 차마 두고는 떠날 수 없는 것들이 있기에 스스로 쳇바퀴의 자물쇠를 안에서 잠근다.

  단순해지고 간소해져야 한다. 적게 가지고 많이 버려야 한다. 비단 정신만의 문제가 아니다. 주변 환경과 소유는 정신을 대면한다. 내가 가진 것들과 움켜쥐고 있는 것들, 삶의 방식과 주변의 변화는 내 영혼의 투영이다.

  목숨을 바쳐 책 몇권을 건져올리는 공자의 제자는 과연 옳은 삶이었나? 아니다. 옳고 그름은 없다. 적어도 내 생각에 그 소중한 책은 그들에게 보물이 되었고 권력이 되었으며 신이 되었다. 단순해져야 한다. 버리고 또 버려야 한다. 역사 속에 그리고 미래 속에 내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의 진실이 내일의 거짓이 되듯 그 때를 위해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나 자신을 버려야 한다.

  많이 가진 자는 그 많은 것들 때문에 노예가 되어 뒷걸음질친다. 새로운 것을 다시 시작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가지지 못했을 때의 무엇이든 될 수 있고 할 수 있다는 용기를 그는 잃어버렸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가진 단 하나의 것은 내 몸이고 나의 정신이다. 그 뿐이다. 육체와 정신, 둘 만이 진실로 내가 가진 유일한 것이자 모든 것이다. 덤으로 지금의 나는 실로 단단한 피부와 건강과 젊음을 가지고 있는데에 무한한 감사와 감동을 드린다.

내 삶의 재미중 하나는?

  맨발 끝에 느껴지는 악셀레이터와 브레이크, 생각대로 움직여주는 멋진 녀석과 2박 3일 여행 중 수 많은 갈등의 나와 마주쳤다. 잘 드는 브레이크와는 반대로 생각은 저 멀리 밀려났고 잘못 들어간 고속도로를 달렸다. 배가 고프면 먹고 잠이 오면 담요를 덥고 잤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다만 소모된 기름통을 채우고 빛물에 갈라진 와이퍼를 교환하고 고속도로 통행료를 지불하는 것 밖에는...
  내키는데로 달리고 멈추고 천천히 가고 창문을 열고 따스한 햇살과 공기를 들이 마셨다. 세상을 다 가진양 떠돌아 다녔다. 네 바퀴가 나의 발이 되고 사이드 미러가 나의 팔이었다. 도로에 작은 돌 한조각과 웅덩이를 나의 두 발로 느끼고 습한 노면의 작은 미끌림을 내 발바닥으로 쓸며 내달렸다. 생각은 동시다발적으로 앞 유리에 펼쳐지기도 하고 발끝으로 지그시 누르는 악셀레이터로 인해 뒤로 사라져버리기도 했으며 이내 생각들이 나를 추월하기도 했다. 음악을 끄고 엔진에 귀를 대고 빗물 후두둑 거리는 소리를 나의 머리카락으로 들었다.
  달릴 수록 깨끗해지는 백미러의 시야처럼 정신은 씻기고 미래를 상상할 수 있고 무참히도 많은 생각과 무념의 순환을 반복할 수 있었다.

2010년 2월 23일 화요일

나는 고민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깨어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고민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고민을 하는 행위에서는 막 터치기 전 꽃망울의 에너지를 본다. 거대한 다홍색의 꽃망울이 채 피우기 전의 미완전의 강력한 에너지를 느낀다. ‘손대면 톡하고 터져버릴 것만 그대’의 노래 가사처럼 터져버릴 것만 같다. 엄청난 양의 물을 저장한 댐의 넘실거리는 물처럼 수문을 통해 삐져나오는 높은 수압의 강한 물줄기처럼 충만감으로 가득하다.
  주변은 고요하다. 실상 변한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 고민의 행위는 주변의 공기 한자락마저 바꿀 수 있는 능력은 없다. 머리카락 한 올 옮길 수 있는 재주도 없다. 하지만 역설적이게 그 것은 공기의 흐름을 바꾸고 머리카락을 날린다. 결정의 기로에서 고민을 행위하고 자기 자신을 장기판의 말처럼 옮기며 판세를 뒤 바꾼다. 몇 수 앞을 내다보는 고민의 힘은 위대하다 못해 경이롭다. “그래, 결정했어.” 이 순간, 눈 앞의 장면은 부지불식간 뒤바뀐다. 그리고 또 다른 고민거리들이 생긴다. 어차피 인간의 인생은 결정의 연속이고 고민의 연속이다.
  고민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합리적, 효율적, 결정전 숙고, 창조, 더 나은 길, 발전, 개발, 새로움 등으로 대신할 수 있겠다. 고민거리 있냐는 걱정어린 주변의 말이 고민이라는 본질을 흐려놓는다. 고민을 통해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고, 삶을 돌아보고 통찰을 얻을 수 있지만 고민은 무조건 안좋은 것인양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고민은 건강을 헤치고 우리의 얼굴을 어둡게 하고, 피폐하게 한다고 여긴다. 고민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술과 피로에 찌들은 인간이 생각난다.
  생각은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상상이자 결정이자 과정이다. 과거이고 미래다. 고민은 그 중 현재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결정과 그로 인해 나타날 결과들을 떠올리고 여러가지를 조합하는 머릿속 사고과정이 고민이다. 고민이 없이는 어떤 것도 될 수 없고, 어떤 것도 가질 수 없다. 고민이 없다면 그는 과거와 미래속에서 사는 사람이다. 원하기만 하고 뭔가를 하지 못하는 팔다리 잘린 정신의 장애인이다. 고민을 통해 지금 결정할 수 있고 지금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근심이 없는 사람이다.
  양면성은 모든 장소와 물건과 사람에게 존재한다. 장점이 단점이 되고, 단점은 장점이 된다. 애초부터 옳고 그름은 없다. 애초부터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없다. 다만 우리에게는 양심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 자아만 있을 뿐이다. 고민 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생각 자체도 그렇다. 그것을 우리 양심에 맞게 그리고 스스로의 자아에 맞게 사용할 줄 아는 도구로 생각하는 것이 그저 나에게는 좋은 길이라고 여긴다. 누군가에게는 아닐 수도 있지만 그 것은 그 사람의 자아와 양심이니까, 그리고 그것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니까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원하는 것 만큼 생각하고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기는 무척이나 힘들다. 돈을 만들어낸 것은 사람이지만 돈의 지배를 받는 것도 사람인 것 처럼 생각이나 고민 역시 마찬가지다. 생각과 고민을 우리가 시작하지만 이내 그것들의 지배를 받는다. 그리고 생각이 우리를 한다. 우리가 꽃을 보지만 꽃이 우리를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꽃을 보고 꽃이 나를 보는 것은 이상적인 사고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꽃이 나만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그 시점은 생각과 고민의 단점이라 여긴다. 적절하게 이 두가지를 융합할 수 있는 생각의 기술이 필요하겠다.
  고민과 근심은 다르다. 고민은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의 창조적 사고과정이라 한다면 근심은 고민을 위한 고민을 거듭하는 사고과정이라 할 수 있다. 디지털 카메라가 월등한데도 기술적으로 폴라로이드를 계량하고 개발하는 기술자와 다를바 없다. 생각의 과정에서 결과가 결여된 고민은 근심을 불러일으킨다. 고민 그 자체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것이 근심이다.

  나는 고민이 좋다. 이 것은 전체로 놓고 봤을때 옳은 것도 틀린 것도 아니다. 그저 내 자신이 고민을 좋아하는 성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 응축된 에너지를 사랑하고 결정에 따른 피드백을 고대하는 것이다. 돌아오는 결과를 정독하는 과정을 즐기는 것이다.